Tuesday, March 10, 2015

마태복음을 앉은 자리에서 통독한 후기

마음이 괴롭고 잡념이 많은 밤이었다.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일어나 고쳐 앉아서 성경책을 읽기로 했다. 눈으로 읽으면 읽으면서도 잡념이 들기 때문에 소리 내어 중얼중얼 읽었다. 지금은 2015년 사순절. 부활절 이전 40일간 예수님을 생각하는 절기이다. 마태복음을 읽기로 했다. 내 나이 만으로 서른셋....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예수의 일생을 읽는다.

예수의 삶에 기쁨이 있었는가? 그의 부모는 결혼 하기 전부터 뜻밖으로 생긴 아이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다. 예수가 활동을 시작한 즈음에 그의 길을 예비하였던 (유일하게 믿을만한 인간인) 세례 요한은 황망하게 죽임을 당한다. 제자들치고 예수말을 제대로 알아 먹는 놈 하나 없고 군중들은 냄비근성으로 좋다고 환호하다가 갑자기 돌로 치라 한다. 그는 병든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이로운 말들을 하였으나 사람들은 비난 조롱 질시를 퍼붓는다. 그의 재판은 엉망이고 붙잡혀 재판 받은지 하루도 제대로 안되어서 사형이 결정이 난다. 그는 황망하게 죽어 버린다. 그렇지만 슬퍼하는 이들앞에 다시 부활하여 나타나서 기쁨과 소망을 준다.

예수의 삶에 기쁨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그런것들...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키우고, 친구들이랑 맛있는거 먹고 여행가서 좋은 구경하고,  물건을 소유하고  보이는 것을 쌓아가고 돈을 벌고 저축을 하고 파티하고 사진찍어 SNS에올리고 좋은 음악을 감상하고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뭐 그런 비슷한 것들을 했을 수도 있다 기록이 안되어 있을 뿐이지... 하지만 적어도 공생애기간 동안에는 그런걸 할 여유도 상황도 없었을 것 같다. 도처에 예수를 이용해 먹거나 혹은 골탕먹이려는 인간들이 득시글 거렸으니. 마태복음에 나오는 인간들은 생각만 해도 인간 세상에 염증이 날 만한 일들의 연속이다. 차라리 3년 공생애 하고 세상을 떠난것이 개인의 안위을 위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 세상은 답이 없다.

예전에 어린 시절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읽으면 그래 이렇게 살아야 해 라는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 심신이 지친 지금은 예수의 가르침을 볼 수록 나는 천국에 가기는 틀렸다는 생각만 든다. 내 나이 열다섯살에 막연히 품은 다짐인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말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 골때리는 세상에서 골때리는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꼬?

다만 최소한의 변태적인 안위라면 세상과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예수님 조차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강제하실수 없었다. 예수를 만나 감화받은 인간들도 다 자기 성질대로 뿔뿔히 행동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인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모른척 생깔거야라고 했는데도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모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다. 베드로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때 예수님이 정말 생까셨을까?

예수님은 사랑이시라하니 아마 말랑말랑한 재판관이어서 못나고 악한 내가 생긴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인생이 더럽게 꼬이고 원하는 대로 안되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안도와 주는데 희망이 안보이는 이 인생이 정상이라는 거다. 그리고 맨날 게으르고 멍청하고 악한 내 몸뚱아리가 부끄러워서 이렇게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도 그저 이런게 인간이라는 거다. 세례요한 같은 아까운 사람도 황당하게 가는게 인생인데 예수님도 욕들어 먹는게 인생인데 내인생이 뭐 그래 찬란하고 아름다울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보이는 것들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것은 정말 힘들고 마음이 쓰리다.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영의 눈이 틔였으면 좋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흠없이 아름답게 살아간 예수의 삶을 진심으로 흠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